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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놀이 외 4편/ 이병철
공사장에서 우리는 무슨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개들이 짝짓기하는 냄새야 아니야 날지 못하는 새의 똥냄새야
죽은 사람 냄새야,
시멘트 먼지 속으로 우리는 코를 킁킁거렸다
죽은 사람 냄새는 슬프다
슬픈 게 뭔지 어떻게 알아? 그건 아직 배우지 않았잖아
철근 위로 어둠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일어서자
우리는 냄새 쪽으로 자갈을 집어 던졌다
저기엔 아무도 없어, 여기서 자고 갈래?
무서워 너희들 등 뒤로 냄새가 따라오는 게 보여
겁쟁이, 우리는 안 죽어
냄새로부터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너희는 몰라
어둠이 냄새를 환하게 밝히는데
너희는 죽음의 냄새 같은 건 없다는 듯
벽돌로 도미노 놀이를 하며 웃고 있었어
그날 밤, 나는 공사장에 코를 두고 왔다
어떤 꿈에선 앞으로 나란히,
도미노처럼 넘어지는 너희를 본다
누가 너희를 밀었니?
아무도 웃지 않는다, 냄새가 난다
내가 마지막 블록이 될게
숨바꼭질 1
아무도 날 찾지 못했으면 좋겠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냄새가 되고 싶어
멀리서 가깝고 가까이서 먼 라일락처럼
환풍구는 어둡고 따뜻하다
세상은 오직 냄새와 소리다
술래가 숫자를 세는 소리
피혁 공장의 본드 냄새
그림자가 쏟아질까봐 몸을 둥글게 만다
죽은 사람의 코와 귀는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가야의 순장을 배웠다
죽은 쥐와 깨진 진로 소주병이 내 부장품이다
술래는 유령처럼 어디든 다닐 수 있지만
환풍구는 유령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
여긴 내 무덤이고 나는 이 세상에 없다
나를 찾는 소리들이 잠잠해지고
날이 저문다
돌뚜껑 같은 어둠을 열고 환풍구를 나선다
모두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환풍구 밖 세상에서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아
무덤에서 나와 골목을 헤매는,
내가 술래라고?
불 켜진 집으로 돌아가는 건 반칙이야
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
장맛비처럼 여자들이 죽었다
비가 멈춘 날엔 커피가 많이 팔린다 도시엔 카페인이 필요하고 달콤한 불안은 덩어리져 녹을 줄 모른다 사건마다 가격이 매겨지고 휘핑크림 같은 소문이 뭉게뭉게 뜨는 오후
옷 속에 칼을 숨긴 사내를 찾아야 한다 철물점 망치의 개수를 세어봐야 한다 배수구 빈칸에 적힌 고양이의 목격담을 번역해야 한다 이웃과 인사를 나눠선 안 된다
여행 가방과 택배 상자와 냉장고엔 토막 난 여름이 담겨 있다 네모난 것들은 네모난 공포를 만드는 거푸집이다 옆집의 오랜 외출을 통째로 삼킨 벽걸이 티브이는 말이 없다
커피포트 끓는 테이블 위에 커피가 없다 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 불면은 티브이의 묵비권을 견디는 힘이다 편의점은 이웃집과 배수구와 철물점이 있는 골목 끝에 있다
에스프레소 엎질러진 골목에 방범카메라가 커피 찌꺼기로 붙어 있다 불 꺼진 창문이 당신의 짧은 외출을 꼬나본다 배수구 위에서 고양이들이 비둘기 시체를 밀매한다 철물점 셔터에 스민 누군가의 그림자가 불빛을 날카롭게 갈고 있다 안녕하세요 당신이 막 모퉁이를 돌 때
다시, 비가 내린다, 커피를 볶듯, 후드득 후드득, 고양이 눈에 찍히는, 바코드
겨울바람의 에튀드*
당신의 발가락은 오래된 건반의 연주를 매달고 있고 거기서 떨어진 각질들은 모두 음악이 되었다 악보를 읽을줄도 모르면서 계속 걷는 말이 불쌍해, 발톱이 튕겨내는 겨울을 창백한 소리로 노래하며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내 입술은 당신의 언 발가락을 녹일 수가 없어 햇빛을 날카롭게 갈아 굳은살을 베어내도 차가운 음계는 당신의 발끝을 떠나지 않았다 이 음악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자, 발가락이 유리잔처럼 깨져버릴 것만 같아
폭설은 이미 잘 짜여진 한 벌의 옷처럼 우리를 감쌌고 얼음의 숨소리가 귓가에 파란 브로치를 달았다 발톱에서 속아 오른 달이 하얗게 변할수록 우리가 걷는 길은 불협화음으로 부서져갔다 유리바다를 걸어도 얼어붙은 발에선 피가 흐르지 않았다
따뜻한 바람이 발가락 사이에서 불어왔다 한 계절보다 긴 음악이 마침내 끝나가고 있었다 더는 걸을 수가 없어, 언 몸을 녹이려고 당신을 힘껏 끌어안았을 때, 당신은 맑은 파열음을 내며 수천 조각으로 깨졌다 내가 들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쇼팽의 연습곡 25번중의 제11곡 A단조
키친 트래블러
두 개의 프라이팬을 나눠 들고 우리는 유통기한이 짧은 계절들을 조리했지 올리브유에 젖은 당근과 파프리카를 뒤집을 때마다 상큼함과 고소함 사이에는 마드리드의 폭염이 지글거렸고 배낭 여행자처럼 웅크린 버섯들이 브로콜리 그늘 아래로 줄지어 갔네
우리가 헤어질 겨울에서 헤엄 쳐 온 메로 한 마리가 당신의 프라이팬을 사랑했고 그 위로 폭설이 내렸지 생선과 채소를 같이 구우면 안 되는 것은 달과 태양을 동시에 볼 수 없는 것만큼 자명해서 당신은 달을, 나는 태양을 이용하기로 합의했네
오레가노, 로즈마리, 바질, 페페로치노는 도시 이름이 아니지만 우리는 거기에 혀와 코를 번갈아 투숙시키며 짜고 매운 감정들을 낭비 했어 밤의 그을음을 따라 왼쪽으로, 아침의 꽃잎들을 좆아 오른쪽으로 당신과 나는 각각 원을 그리며 접시위에 노을을 쏟아 부었네
두 개의 프라이팬이 하나의 요리를 완성하면 우리는 하나의 접시 위에서 몸을 포갰지 먹고 마시느라 사라져버릴 것들을 사랑하느라 백설탕 엎질러진 선반에 우글거리는 개미들마저 음악으로 들렸네 접시에 담긴 개기일식 속으로 빛은 치즈처럼 늘어져 내렸고
요리는 일종의 여행이라고 당신이 말했고 나는 주방이 야간열차 같다고 대답했어 솥이 끓는 소리로 기차가 달리고 도마위로 걸어오는 구두굽 소리가 점점 커지면 무뚝뚝한 검표원을 닮은 오븐이 고기와 채소들을 회수해 가니까
향신료들이 세운 도시를 지나 냉동육이 드라이아이스로 빛나는 겨울을 향해 우리는 떠났어 새로운 요리를 시작했다는 얘기지 당신의 혀가 가장 예민해질 때, 겨울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고 지난 계절은 씽크대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데, 이 맛있는 냄새를 어떡하지?
*이병철 – 1984년 서울생 명지전문대 문창과, 서울과기대 문창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창과 석사수료. 2006년 강원신춘 <여행, 스무살의 열차>가작 입선
- 이병철의 시편에 대하여
이병철의 시에는 죽음이 전체적인 배경이자 소재로 깔려 있다. 주로 어린 날의 기억들이 소재가 되면서도 거기에는 항상 죽음이 따라다닌다. 「도미노 놀이」에서 ‘나’는 또래 아이들과 달리 죽음의 냄새를 맡고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조숙한 자아이다. 「숨바꼭질 1」에서, 환풍구에 숨은 ‘나’는 정작 숨바꼭질에는 관심이 없고 순장당한 사람처럼 무덤 안에 있는 흉내를 내본다. 화자가 성인인 「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지루한 장마철 어느 날의 풍경은 불길한 기운들과 엮여서 직조되어 있다. 불길한 소문들이 넘쳐나고 여행 가방이나 상자, 냉장고 같은 일상의 사물들에서 공포가 자라고, 고양이 울음과 비둘기 시체가 함께 있는 기묘하고 불길한 날이다.
이병철의 시는 이 불길한 죽음의 낌새를 ‘냄새’와 ‘소리’라는 구체적인 감각으로 형상화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나’가 감지하는 죽음, 장마철의 퀴퀴함, 그것을 상쇄시키는 커피 모두 ‘냄새’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추상적인 것들을 구체화하여 표현하는 것은 시 창작의 기본이지만, 실제로 대상을 감각적으로 적확하게 표현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를 감안할 때 ‘냄새’로써 대상을 관찰하고 전달하려고 하는 일관된 시도는 사줄 만한 것이다.
군데군데 참신하고 재미있는 표현들도 눈에 띄었다. 예컨대 “다시, 비가 내린다, 커피를 볶듯, 후드득 후드득, 고양이 눈에 찍히는, 바코드”(「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는 그쳤다가 다시 쏟아지는 장맛비의 모양을 커피를 볶는 것에 비유해서 참신했고, 빗줄기의 모양을 “고양이 눈에 찍히는 바코드”로 표현한 것도 재미있다. “멀리서 가깝고 가까이서 먼 라일락처럼”(「숨바꼭질 1」)이라는 표현 또한 적확하다. 라일락 향기는 멀리서는 강하게 감지되지만 가까이 있을 때는 후각이 무뎌져서 오히려 잘 감지되지 않는다. 이러한 표현들은 관념이 아닌 실제 경험과 관찰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기본적인 신뢰감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주제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나 독창적인 해석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예컨대 “장맛비처럼 여자들이 죽었다” 「장마엔 카페인이 필요하고」와 같은 도전적인 진술은 진술자체로 끝나버리고 아무런 설명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느낌으로 선취한 ‘죽음’의 문제를 좀 더 오래 깊이 있게 들여다 볼 것을 권한다. 아울러 소재나 주제 면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는 시가 더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함께 투고한 「키친 트러블러」는 경쾌한 산문시를 지향하는 듯 하지만 지루하고 「겨울바람의 에튀드」는 불투명한 기운이 시를 감싸면서도 정작 알맹이가 없었다. 시가 길어지면 언어의 낭비가 심해진다는 것도 지적해 두어야 할 부분이다.
(심사위원 김종철, 구모룡, 문혜원, 최현식, 김병호)
-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